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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만연한 '직권남용'에 경종 울릴 판례를 기대하며
직권남용의 남용이다.”
 
성추행 후 보복성 인사권 남용혐의로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 측 변호인은 지난 18일 항소심 첫 공판준비기일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앞서 지난 달 11일 열린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사법행정권 남용첫 재판에서도 같은 말이 나왔다.
 
안태근 측은 특히 직권남용은 판례를 검색해 봐도 60~70년 사이 46건이다. 기소되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요즘 와서 유독 많이 기소되는 건 갑자기 공무원들이 직권남용을 많이 해서 그럴까하는 생각이 든다며 의문을 제기했다국정·사법농단연루자들을 비롯해 각종 채용비리나 이재명 경기지사 등 전·현직 고위공직자들이 대거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명으로 기소된 현상에 대해, 이전엔 처벌하지 않던 행위를 명목으로 여론에 편승하거나 정적을 밀어내기 위해 무리한 기소와 재판을 하고 있다는, 일종의 음모론이다. 지난해 우리사회에 검사도 성폭력을 당한다는 충격을 안기며 미투 운동을 촉발한 서지현 검사에 대한 국민적 지지에 힘입어 도덕적으로 지탄받을지언정 법리적으로 처벌할 수는 없는 행위에 1심이 실형을 선고해 법리오해가 있다는 항소 이유다.
 
형법 123조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1953년 제정 이후 벌금형 추가 외엔 지금껏 변함없이 자리를 지킨 조항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1~9 등급을 매기고 철저한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공직사회에서 상관의 명령 중 부하직원이 따를 의무는 어디까지이고, 국가정책을 움직이는 고위공직자의 지시 앞에서 같은 급이 아닌 말단 공무원이 자신의 청렴과 자존심을 지키면서 조직 분위기를 흐리지 않을 정도의 권리행사를 위한 명령 불복종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었을까. 행정직이 상관 집 강아지를 돌봤다거나, 머리가 좋아 장군의 자녀에게 개인과외를 하며 편안하게 군 복무를 마쳤다는 경험담이 비일비재하다.
 
더구나 변호인이 예로 든 ‘70년대는 서슬 퍼런 군부독재기다. 하필 그 시절과 오늘을 비교해준 덕에 왜 요즘 직권남용죄 사건이 많아졌는지가 더 선명해졌다. 그때는 약자가 강자 앞에 감히주장할 수 없었던 의무와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시대라는 의미다. ‘국정운영권 남용으로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은 아버지 시절에 했던 일을 했을 뿐인데 감옥에 가게 돼 억울할 수 있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예전에 했던 일을 반복한 건데 갑자기 유죄라고 하니 당황스러울 거다.
 
임 전 차장과 안 전 국장 등 재판을 받는 판검사들도 비슷한 심정일 것 같다. 판례를 줄줄 외우고 처벌의 전례가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법부와 검찰 수뇌부들이 이 정도면 법적으론 문제 될 것 없으리라며 어련히 잘 피해 갔을 법망 아닌가. 이들을 법정에 세운 건 민심만이 아니라, 유명무실한 줄 알았지만 제정 이후 반세기 넘게 자리를 지킨 법 조항의 힘이다.
 
일선 판검사는 잘 몰랐던 사법부와 검찰조직 꼭대기운영 과정에서 있었던 권리와 월권의 교묘한 경계를 입증해야 하는 검찰로선 부담이다. 전례 없는 판결을 써나갈 재판부도 고민이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에도 공직사회에 만연했던 직권남용을 근절하고, 민간까지 영향을 미쳐 상명하복의 직장문화 전반을 선진화 할 판례를 남길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 직권남용에 경종을 울릴 전향적 판결을 바라 본다.
 
 
최서윤 사회부 기자(sabiduria@etomato.com)